래디컬 Radical

복음을 통한 철저한 돌이킴

래디컬 Radical

(Talking Back your faith from the American Dream)

데이비드 플랫 지음(최종훈 옮김) 두란노 출판

작가 : 앨라바마 주 버밍엄에 소재한 브룩힐즈 교회의 담임목사로 조지아 대학을 졸업후 뉴올리언스 침례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2006년부터 담임하고 있는 브룩힐즈 교회는 매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방을 뒤흔드는 공동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4천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자세한 교회 비전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www.fadicalexperiment.org

Chapter 01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따를 만한 분

도입질문 :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최연소 대형교회 담임목사란 꼬리표를 달고 부임 첫날부터 나는 교회를 더 크고 멋지게 만드는 갖가지 전략에 매달렸다. “어느 규모로 키울지 일단 정해 놓고, 과감하게 도전하라” 모든 사람들이 속삭이는 듯했고,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 마다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실 개인적으로 모델을 삼았던 분은 열두 명의 교인들과 하루 스물네 시간을 다 쏟아 부었던 목회자였다. 그분이 떠날 때 그 가르침을 따랐던 교인은 고작 120명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모델로 삼고 싶은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 최연소 초소형 교회 담임목사’였던 셈이다.

예수님은 대중들의 시선을 끄는 일 따위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셨다.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주님은 숫자에 연연하시기는커녕 급진적인 메시지를 믿고 따른 몇몇에게 집중하셨다. 그리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그 소수를 사용하셔서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셨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든 기독교인들이든 세상적인 기준을 토대로 성공을 추구하고 삶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전 3주 동안을 아시아의 지하교회들을 돌아보았다. 그곳과 부임한 교회의 모습은 사뭇달랐다. 생생하게 마음에 각인되었던 위태롭고 절박한 분위기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던 지하교회들의 모습은 우리 교회에는 없었다. 그저 주일이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고, 아이들은 교회에 오자마자 에어바운스로 달려들었으며, 예배당과 인접한 공터에 최신식 놀이터와 각종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이벤트 홀을 짓자는 계획이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 당시의 모습처럼 교회가 신앙의 급진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리고 그 빈자리를 안락한 내용들로 채워 버린 것은 아닌지, 오늘의 교회는 자신을 부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안위에만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믿음은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누가복음 9장 후반부에는 제자가 되겠다며 예수님을 찾아온 세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애써 만류하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셨다. 그들을 만류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노숙자가 되어라, 아버지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가족과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마라.” 이 본문을 주제로 처음 메시지를 들은 것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던 짐 섀딕스(Jim Shaddix)교수를 통해서였다. 그분이 어느 집회의 설교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오늘 밤, 저는 여러분을 뜯어말려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만들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라고 외쳤다. 그는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을 정확하게 옮겨 가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려움을 달게 받는 자리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는데 수많은 이들이 강단 앞으로 나왔다. 좋은 걸 배웠으니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청소년 모임에서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다. 섀딕스 교수님보다 훨씬 깔끔하고 훌륭하게 전했다고 자부하지만 강단 근처엔 개미 새끼 하나 볼 수 없었고, 보다 못한 집회 관계자가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끝내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주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삶 곳곳에서 누가복음 9장과 비슷한 사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눅 14:26, 27, 14:33, 막10:17)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겉보기에는 짤막하고 단순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을 뒤흔드는 급진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님은 안락한 환경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의 길을 중심으로 삶의 판을 완전히 새로 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세워놓았던 계획과 꿈을 접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계획과 비전을 새로 깔아야 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본문을 대하면서 “이 가르침은 다른 뜻이 있을 거야. 이 말씀의 속뜻은...”라고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킬 방도를 찾아 헤매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는 잘사는 국가, 중산층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멋진 예수, 물질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돈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는 예수다. 수지타산을 정확하게 맞추며 위태로운 극단을 다 피하기를 바라는 예수다. 세속적인 욕망과 야심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안락한 삶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예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예배당에 모여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속의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제임스 애덤스가 1931년 처음 사용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란 말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큰 목표를 추구할 자유는 오히려 높이 평가되고 확실하게 보장해 주어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에는 ‘인간의 가장 큰 자산은 재능’ 이라는 위험한 추정이 깔려있다. 이는 복음의 우선순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복음은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복음을 통해 직면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요 15:5)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과정에서 빠지기 십상인 교묘하고도 치명적인 함정이다. 제힘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누구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쉽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의 존재와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과 아메리칸 드림은 명확하고도 결정적으로 충돌한다. 아메리칸 드림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랑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일부러 그분은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매달리고 있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 운영계획과 전략, 수단과 방법들을 생산하는 시스템은 걱정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맹목적인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목회자, 열심히 일하는 참모들, 상황 판단이 빠른 원로들과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 성도들이 힘을 합쳐 이끌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보라. 멋진 퍼포먼스와 군중을 사로잡을 만한 스타같은 설교자, 기량이 뛰어난 찬양팀과 밴드, 찾아오는 군중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예배당, 한번 오면 떠나지 않게 붙잡아 두는 최상급, 최고급 프로그램들을 마련하는데 우리는 몰두하고 있다. 오늘날 성장하고 역동적이며 성공적인 교회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요소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이끌고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모른 채 여러활동들을 매끄럽게, 효과적으로, 더 나아가 아주 성공적으로 전개할까봐 겁이 난다. 하나님의 권능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세가 빠진, 주님의 권세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은품정도인 교회가 될까봐 겁이 난다.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로 말이다. 그것이 두렵다.

Chapter 02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래디컬 실험

부르심1 (전 세계를 품으라)

로마서 1장 14-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로 규정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모두 빚을 졌다고 고백했다. 곧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유된 나는 그분을 세상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민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채무를 생각해보라. 갚아야 할 빚이 이렇게 많은데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인 선교관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이들이 ‘내 나라부터 먼저 돌보자’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 구호는 그분 마음의 1퍼센트도 알지 못한다는 자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략 6,783,421,727명.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세계인구다. 67억을 넘어가고 있는 이들 중 약 33퍼센트의 그리스도인을 제외하면 무려 45억에 육박하는 인구가 예수를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다. 당연히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안팎을 따질 것이 아니라 안팎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디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뭇 민족들에게 알리는데 온 힘을 다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라. 예수님의 행동방식을 살펴보면 그분은 거대한 혁명을 주도하셨지만 ‘대형’이나 ‘다수’를 추구하지는 않으셨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공신화에 집착하는 한, 세상의 손아귀에 잡혀 박제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친 후 다시 다른 이들의 삶에도 똑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워 두신 전략의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무엇이든 크면 클수록 좋고, 더욱 빛날수록 효과적이라고 믿는 문화속에서 예수님은 한결같이 겸손하게, 그리고 묵묵히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부르심2 (재정을 의미있는 곳에 사용하라)

배부른 몇 나라, 그리고 굶주린 나머지 세계를 그리스도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 세계에 오늘도 무려 10억명이 넘는 이들이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2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버티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20억명에 육박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에도 2만6천명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로 치자면, 이 지역에 거주하는 18세 이하 어린이들이 이틀 안에 모조리 죽음을 맞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 등의 영적으로 시급한 과제를 이야기하려면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대해서도 깨어있어야 한다. 아무 힘이 없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을 기억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임이다. 물론 성경은 그 어디서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 내면의 변화를 불러오고 그것은 다시 외적인 열매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연민을 갖는 행동들은 성도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잘사는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각지대는 ‘물질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르심3 (나를 필요로 하는 낯선 곳에서 섬기라)

내가 사는 미국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는 개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인간평등이 사상평등으로 변질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서로의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해주자며 믿음도 서로의 다른 것을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대로라면 신앙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의 문제가 되고 만다. 각자가 조용히 믿으면서 다른 이의 신앙은 건드리지 말자는 이런 사조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일꾼을 보내시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듣는 구조임을 명심하자.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미 성경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편안함, 재물, 안정, 안전, 심지어 목숨까지도 다 걸고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잊지말자.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부르심4 (복음적인 지역교회에 헌신하라)

그리스도의 광대한 몸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지역의 형제자매들이 한데 모여 하늘나라 공동체의 식구를 이루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내가 만약 헌신적이고 활동적이며 열성적으로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다면, 기본적으로 신앙 공동체에 삶을 드리는 데서부터 래디컬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지역 교회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저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주님을 좇아가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부자 청년이 재물을 지키러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주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곧바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들을 얻게 되며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이처럼 놀라운 영적 가족이야말로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초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좇으려면 반드시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급진적이고 단순한 삶을 목격하라. 그러면 한결 심플한 삶을 살기가 쉬워질 것이며 앞선 래디컬들을 따르기 수월해질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일은 본래부터 개인에게 맡겨진 과제가 아니었다. 늘 교회와 더불어 움직이며 서로에게 필요한 공동체를 위해 삶을 바치라. 교회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설계하신 특별한 도구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삶을 바치라.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를 따르라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95

2. James Truslow Adams, The Epic of America(Boston : Little, Brown, 1933)

3. George Muller, Answers to Prayer, comp. A.E.C. Brooks(Chicago : Moody, n.d.)

4. Charles Edward White, "Four Lessons on Money from One of the World's Richest," Christian history 7, no. 19(1988)

5.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John Pringle(Grand Rapids : Baker Book,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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